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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못하는 농민에게 바캉스를 허하라!

기사승인 2021.08.13  17: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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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어가는 농촌에 절실한 ‘워라밸‘... 소득과 여가 보장되는 곳에 사람도 모여

[한국영농신문 이병로 기자] 

코로나 19의 4차 대유행 속에서도 여름휴가철은 어김없이 시작되고 끝나간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식당·세탁소·학원 등도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닫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많은 사람들은 7월말부터 8월초 사이에 쉰다. 길면 1주일, 대개는 3~4일에 불과하지만 일상을 떠나 여행을 가거나 평소 못했던 일을 한다. 바야흐로 ‘바캉스’ 계절이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 Vacance(바캉스)는 휴가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영어로는 Vacation(베케이션), 같은 뜻이다. 라틴어 Vacatio(바카티오)가 어원인데 ‘비어 있다‘, ‘자유로워지다‘라는 의미다. 일상을 억누르던 노동과 고뇌로부터의 자유와 비움, 이게 휴가의 목적이다. 

기계를 쉬지 않고 돌리면 고장 난다. 그래서 가동과 정지, 점검과 수리를 주기적으로 해줘야 오래 쓸 수 있다. 기계도 이런데, 사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람도 주기적으로 쉬어야 더 능률이 오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주 5일 근무제를 넘어 주 4일 근무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주당 52시간 이상 노동을 제한하는 법령도 마련되어 있다. 모두가 인간의 기본권인 휴식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다. 

지금이야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로 여겨지지만  20세기 초반 만해도 노동자는 기계와 같은 생산도구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하루 10시간~14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제동이 걸린다. 그 분기점은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의 출범부터다. ILO는 제1차 총회에서 하루 8시간, 주 6일 근무, 주당 48시간 노동을 국제노동기준으로 채택했다. 물론 즉시 모든 노동현장에서 ILO 규범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부산 해운대 해변 [사진=이병로 기자]

이처럼 100년 전만해도 유럽 등 산업국가에서조차 기업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고 노동자의 권리를 경시되었다. 당연히 노동자들은 장시간 근무와 저임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프랑스에서부터 반전의 계기가 생겨났다.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와 좌파 자유주의 정당인 급진당(Parti Radical), 프랑스 공산당(PCF) 등이 정치연합체인 인민전선을 결성한 것.

이들은 1936년 5월 프랑스 의회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되었고 SFIO의 당수인 레옹 블룸을 총리로 하는 연립 내각을 구성했다. 여기에 선거기간 중인 5~6월에 발생한 대규모 파업이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강해졌다. 새로 들어선 좌파 연립정부는 즉각 중재에 나섰다. 그해 6월 7~8일 프랑스 총리 공관인 마티뇽에서 노동자와 사용자 단체는 단체협약 체결 의무화,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가입, 최저임금 인상, 파업권 인정 등을 골자로 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낸다. 이렇게 회의가 열린 장소로 이름을 딴 역사적인 ‘마티뇽 합의’가 탄생하게 됐다. 

인민전선 정부는 마티뇽 합의를 바탕으로 개혁적 복지 정책을 연달아 내놓는다. 연간 2주일의 유급휴가, 주 40시간 노동 등이 보장되었고 고령자와 상이군인의 연금과 실업보험제도 등도 개선됐다.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은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산과 바다를 찾아 장기간 여행을 떠났다. 2주간 보장된 유급휴가를 사용하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권기간이 2년 남짓에 불과했던 좌파 연립정부가 만들어낸 성과였다.

이후 프랑스의 바캉스 기간은 늘어나서 50년대에는 3주, 60년대에는 4주까지 됐다. 급기야 80년대 집권한 미테랑 대통령은 연 5주간의 유급휴가를 법제화했다. 이제 7월~8월이 되면 프랑스 전역에서 인구의 대이동이 일어난다. 파리 같은 대도시들도 관공서는 물론 병원, 레스토랑까지 대부분이 문을 닫고 여름휴가를 즐긴다. 몸과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를 털어내려고 떠난 사람들 덕에 분주하던 도시도 ‘쉼‘을 얻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한 달을 위해 열한 달을 일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더 잘 일하기 위해 쉬는 게 아니라, 잘 놀기 위해 일한다는 그들의 가치관을 빗댄 표현이다.

프랑스 남부의 니스 해변 [사진=픽사베이]

프랑스 노동자들과 좌파정권 덕택(?)에 세계인들이 바캉스를 즐기게 됐다. 우리나라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보장받게 된 유급 연월차 제도를 이용해 여름휴가를 떠나는 유행이 생겨났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따금 일상을 벗어나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럴 여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터를 좀처럼 떠나기 힘든 농민들이 대표적이다. 

바쁜 봄철에 비하면 여름철이 농한기지만 여전히 농사일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침저녁으로 하우스 문을 열고 닫아야 하고 큰 비가 쏟아지면 당장 논에 나가 물길을 내야한다. 연중 다른 작물을 번갈아 키워야 해서 따로 농한기 없는 농가도 많다. 20년째 제자리인 농업소득 탓에 잠시 짬이 생기면 인근 농가나 도시로 나가 부업을 하기도 한다. 

대신 일을 해줄 사람이 없는 것도 쉬지 못하는 이유다. 2019년 통계청의 농업취업자수 통계에 따르면, 무급 가족농 또는 고용원이 없는 홀로 농사짓는 취업자수는 각각 38만 명, 83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수 139만명 대비 87%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한 두 명이 일하고 있는다는 뜻이다.

휴가는 고사하고 친지들 경조사 챙기기도 힘든 우리나라 농민들은 어떻게 여가를 보내고 있을까? 2018년 농촌경제연구원은 읍·면 거주 농촌주민 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농촌주민들의 문화·여가 활동은 ‘TV 시청·라디오 청취·음악 듣기(42%)’가 가장 많았고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검색(18.7%)’이 그 다음이었다. 이어 ‘운동(5.9%)’ > ‘등산·낚시·여행·나들이(5.7%)’ > ‘요리 배우기(1.3%)’ > ‘서예·그림·사진 (1.1%)’ > ‘봉사활동(1%)’ 순이었다. 

이런 여가활동을 하는 이유로는 ‘가장 익숙한 것이어서(36.1%)’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12.7%)’ > ‘가장 즐거워서(21.1%)’ 순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여가활동 근거지가 ‘본인의 집(75.4%)’이라는 응답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한마디로 농업인들은 마땅히 즐길 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주로 집에서 TV를 보거 컴퓨터를 보며 쉬고 있는 셈이다.

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는 6월 23일(수) 오전 11시 국회 정문 앞에서 농민기본소득법안의 국회 발의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 참가단체 대표 등 1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행사에서 허영 국회의원과 공동발의에 참여해준 여러 국회의원들의 입법발의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

꼭 여름휴가가 아니더라도, 이들에게 바캉스를 허(許)할 수 있을까? 스마트 팜, 밭농사 기계화 등으로 작업시간을 줄이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소득이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농민들에게도 쉴 시간이 생기고 여행 등 다양한 여가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농민이 부자가 된다는 건 농산물 가격이 높아진다는 걸 의미하고 이것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대부분의 도시민들의 민생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농산물 가격은 통제의 대상이었다. 농산물 가격이 올라가면 당국은 어김없이 수입을 해서 기어코 내려놓고 만다. 농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농업소득’이 늘 제자리인 이유다. 

한편, 농업계는 노령화로 농촌이 비어간다, 인구 유입이 절실하다며 아우성이다. 그런데 지금같이 연중 쉼 없이 일해야 겨우 먹고 사는 농촌현실을 그대로 두고 청년농과 귀농을 권할 수 있을까? 지자체와 농정당국이야 귀농귀촌이 지상과제겠지만, 일 년에 한 번씩 여름휴가를 즐겨오던 젊은이들과 도시민들에게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이제 농업도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Work Life Balance)에 주목해야 할 때다. 농민은 놀면 안 된다고? 100년 전 유럽의 노동자들에게도 바캉스는 귀족들이나 할 수 있는 사치였음을 잊지 말자.

농산물 가격도 안정시키고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는 묘안은 있다. 바로 농민에게 적절한 소득과 여가를 보장하는 것이다. 농업은 국가 존망을 결정하는 안보산업이고 환경과 경관을 지키는 생명산업이다. 이는 공익적 가치를 지키는 농민들에게 농민기본소득이나 농민수당 등을 지급해 소득을 보전해주자는 주장의 배경이다. 농민에게 비움을 허하고 농촌에 사람을 채울 것인가, 그래서 경쟁력 있는 농업의 기반을 만들 것인가? 이제 국가 전체의 지혜와 합의를 모을 때다. 나라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지도자들의 해법과 결단을, 유권자들은 지켜보고 있다.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

<저작권자 © 한국영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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