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학명에 많아... '일반명'에라도 우리 이름 달아줘야
금강초롱꽃 [사진=국립수목원] |
[한국영농신문 이병로 기자]
‘아놉탈무스 히틀러’라는 학명이 있다. 히틀러를 숭배하던 독일 곤충학자 오스카 샤이벨. 그는 1933년 슬로베니아에서 발견한 곤충에 히틀러(Adolf Hitler)를 기린다며 아놉탈무스 히틀러라고 학명을 지어 붙였다. 학명이란 학술적 편의를 위해 동식물에 붙이는 이름인데, 식물학자 린네가 창안, 라틴어를 사용한다.
이 밖에도 관심을 확 잡아끄는 학명들은 참 많다. 지난 2022년 아프리카 밀림에서 발견한 나무엔 미국 헐리우드 영화배우 디카프리오의 이름이 붙었다. 학명은 ‘우바리옵시스 디카프리오’. 바이든 미국 대통령 이름도 등장한다. 약 3억 년 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10개의 다리를 지닌 문어엔 바이든 대통령의 이름을 따 ‘실립시모포디 비데니’(Syllipsimopodi bideni)란 학명이 붙었다. 이 밖에 가수 비욘세, 레이디 가가, 오바마 대통령 이름이 들어간 식물, 동물 학명도 존재한다.
재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건 바로 선점 효과, 선취권이란 걸 국제사회에서 인정하기 때문이다. 학명은 국제식물명명규약에 의해 가장 먼저 이름을 붙인 사람의 선취권을 인정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식물 학명에 수백 번 넘게 등장하는 일본인도 있다. 그는 바로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 식물학자로서 일제강점기 조선 팔도와 아시아 전역을 누비며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집어넣은 걸로 유명한 사람이다.
얼마나 이 이름이 학명에 자주 등장하는지 놀랍기만 한데, 국립수목원에 따르면 한반도 특산식물 527종 중 327종의 학명에 ‘나카이’(Nakai)라는 일본 식물학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식물 종류 > 발견 지역 > 발견자 순서로 표기되는 학명 특성상, 나카이라는 식물학자의 이름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특산식물 학명으로 굳어져 내려온 것이다.
금강초롱꽃이 대표적인데, 그 학명은 하나부사야 아시아티카 나카이(Hanabusaya asiatica Nakai). 울릉도와 독도에서 발견되는 섬기린초, 섬초롱꽃의 학명에도 일본인들이 독도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다케시마’(竹島)라는 말과 식물학자 나카이 이름이 붙어 있다. 섬기린초 학명은 세듐 다케시멘세 나카이(Sedum takesimense Nakai). 섬초롱꽃 학명은 캄파눌라 다케시마나 나카이(Campanula takesimana Nakai)이다.
학명뿐 아니다. 학명을 보조 설명하는 영문 이름에서도 일본과 일본 식물학자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실정. 우리나라 애국가 2절 가사에도 등장하는 ‘소나무’ 역시 학명은 라틴어로 돼 있지만, 영어 이름은 ‘재패니즈 레드 파인’(Japanese Red Pine)이라고 되어 있다. ‘일본 적송’이라는 뜻.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만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더 살펴보면 일본식 학명 중에 황당하고 낯 뜨거운 것들도 존재한다. 며느리 밑씻개라는 식물은 일본어 ‘의붓자식의 밑씻개’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큰개불알꽃 역시 한 일본인 식물학자가 그 열매가 개의 음낭을 닮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최근엔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의 노력으로 며느리 밑씻개는 가시모밀, 큰개불알꽃은 봄까치꽃 등으로 고쳐 부르고 있는 실정.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2001년부터는 국내 학자가 학명을 붙인 식물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 사실 우리나라 자생생물 학명은 2000년 이전까지는 일본·유럽·중국 학자들의 이름이 들어간 게 주류였다. 우리나라 연구자가 학명을 붙인 비율이 2000년도 이전에는 겨우 3%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바뀌면서 최근에는 학명에 우리나라를 뜻하는 코레아나(coreana)가 붙는 경우도 크게 늘어났다. 특히 2001년 이후 최근까지 발견된 719종의 한반도 고유종 가운데 무려 91.6%인 659종을 국내 학자가 학명을 지어 붙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화악산 설악산 참닻꽃의 학명은 할레니아 코레아나 에스엠 한, 에이치 원&씨이 린 (Halenia coreana S.M.Han, H. Won & C.E Lin), 한국앉은부채의 학명은 심플로카르퍼스 코리아너스 제이에스 리, 에스에이치 킴&에스씨 킴 (Symplocarpus koreanus J.S.Lee, S.H.Kim & S.C.Kim)이다. 리, 한, 킴, 원 등 한국인의 성이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에 따르면 참닻꽃, 한국앉은부채처럼 국내 학자가 학명을 지은 자생생물의 수가 2000년과 비교해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우리나라 고유 식물의 학명과 영어 이름 개명에 오랜 세월 천착해온 천주교 정홍규 대구교구 신부는 “학명은 국제식물명명규약이 정하는 선취권 때문에 바꾸기 어렵지만, ‘일반명’은 1종의 식물에 다수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우리 식물들에게 지역, 모양, 특징을 떠올릴 수 있는 우리 이름을 달아주는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정 신부는 제주 자생 식물인 제주 왕벚나무의 학명이 거의 100년 이상 소메이요시노벚나무 (프루너스 예도엔시스 마츠무라, Prunus yedoensis Matsmura)라고 되어 있는 것을 제주도 지명을 넣어 프루너스 제주엔시스 타케트 (Prunus jejuensis Taquet)로 개명하는 운동도 펼치고 있다. 이렇게 학명을 선포해야 역사적으로 공정할 뿐더러 (사람도) 식물도 주체적으로 서게 된다는 게 정 신부의 주장이자 확신이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이병로 기자 leebr@youngnong.co.kr